김희태(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이사)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들렀다. 매번 익산을 들를 때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곳으로, 지난 2019년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미륵사지 석탑의 존재는 그 자체로 백제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은 2001년 해체와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이러한 미륵사지의 창건은 <삼국유사> 무왕 조의 기록이 절대적이었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사자사로 행차하던 무왕과 선화공주가 용화산 아래 연못에 이르렀을 때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연했다고 한다. 이에 선화공주가 사찰 건립을 요청해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고, 미륵삼존의 모습을 따서 전각과 탑, 회랑을 만들었는데 이 사찰이 바로 미륵사다. 실제 미륵사는 백제의 전통 사찰 건립 방식인 11금당이 아닌 33금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영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당 금석문에서는 가람을 세우고, 탑에 사리를 봉안한 인물이 백제의 왕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문제는 백제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배치가 된다. 따라서 이 경우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를 비롯해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등 기존과는 다른 해석들이 가능한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한편, 해체 복원 이전의 미륵사지의 모습을 보면 시멘트로 석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이 불편해한다. 특히, 보수가 이루어진 시기가 일제강점기라고 이야기해 주면 일제가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훼손한 것이라 분개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미륵사지 석탑의 사진을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또한, 지금이야 시멘트를 문화유산의 복원에 사용하는 것이 말도 안 되지만, 당시에는 최신의 공법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시멘트로 보수한 것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오히려 이렇게라도 보수하지 않았다면 미륵사지 석탑은 진즉 무너져 사진으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체 복원 이전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붕괴되지 않도록 시멘트로 보수한 모습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체 복원 이전 익산 미륵사지 석탑, 붕괴되지 않도록 시멘트로 보수한 모습이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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