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에 검게 가라앉은 바다 위로 매운 해풍이 불어온다. 이 찬 바람을 맞으며 어떻게 버티나 싶은 겨울 바다. 맑은 햇빛도 얼음처럼 차게만 느껴지는 겨울의 한 복판, 매향리 마을 앞 바다.
이 겨울바다의 칼 바람 보다 더 매섭게 공기를 가르며 하늘을 날아다니던 미 공군 전투기의 사격훈련장이 문을 닫은 지 15년 째다.


아직은 눈에 익숙하지 않은 숫자 2020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듯 황량한 바다에는 매서운 바람의 힘을 입은 파도만 열심이다.
이 넘실거리는 파도 덕에 겨울 바다도 쉬이 얼지 않는다. 그 아래 몸을 낮춘 채 버티며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거친 파도가 되레 폭신한 이불일 터이다. 짭조름한 소금을 잔뜩 머금은 바닷물은 찬 공기에 잔뜩 무거워져 가라앉으며 아래에 있던 바닷물을 위로 밀어 올리니, 조용하지만 나름 거대하고 바쁜 자연의 순환이다. 


모두 다 사라진 듯 보이는 바다 속에 여전히 생명이 있다는 증거다. 죽음처럼 적막하던 겨울 바다에 드높은 아이의 목소리가 통통 튀어 다니며 순간 생명을 불어 넣는다. 곧 다시 찾아 올 푸른 생명에 대한 희망을 이미 발견한 듯하다. 지금은 잠시 삶이 중단된 듯 차갑고 황량한 바다지만, 이곳에 찾아 올 변화에 사람들의 마음은 해맑다. 그래서 우리의 한 해 시작은 하필 겨울이다.


보들보들한 새싹이 피어 오르는 봄도 아니고 짙푸른 생명이 폭발하는 여름도 아니고. 꽝꽝 얼은 땅을 밟으며 곧 따뜻한 날이 올 거라 마냥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이 바로 한 해의 출발이 겨울이다.
험하고 추운 날을 버티며 다지고 다져야 제대로 자라나는 희망, 이제 따뜻한 바람이 불면 펼쳐 질 매향리의 미래 역시 그 희망으로 만들어졌다.

미래를 위해 기억을 남기다

여느 어촌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 바다에 찾아 올 변화의 징조를 만나러 매향리 마을로 가보자.
꽁꽁 얼어 붙은 땅이 낮 동안의 햇볕에 살짝 몸을 녹이려 해도, 아직은 찬 바다를 스쳐오는 해풍에 역부족이다. 그래도 차가운 바람 사이사이 스며드는 햇볕이 슬며시 웃음지게 한다. 이 햇빛이 좀 더 기운이 세지고 좀 더 넓게 퍼지면 이 마을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손가락 세 개만 접으면 이내 찾아올 5월, 미 공군의 전투기가 훈련하던 쿠니 사격장 자리에 평화생태공원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은 어촌 마을에 들어서는 33만 제곱미터의 공원이라니. 미 공군기가 날아 다니던 땅은 예상보다도 넓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평으로 계산하면 거의 10만 평의 땅이 전투기를 위한 폭격 훈련장에서 모든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커다란 육상 사격판이 세워져 있던 해안들판에는 습지원과 해안 사구원을 만들어 전투기 대신 철새가 날아드는 보금자리가 된다.


여기에 조각공원과 전망대, 캠핑 시설까지 들어서면 인근의 도시 사람들도 찾아와 잠시 숨돌렸다 가는 쉼터가 되는 것이다. 아직 완공을 앞두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공원 부지로는 들어갈 수가 없지만, 마을에서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며 완성 이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54년 간의 고통의 기억을 묻어 버리는 대신 남기기로 했다. 쿠니 사격장의 시설물은 ‘경기도 제1호 건축자산’으로 등록해 공원 안에 고스란히 보존된다.


미 공군의 전투기가 이 땅 위를 날아 다닐 수 있도록 사격장 운영을 책임지던 대대장의 숙소도, 마을 앞 바다에 포탄을 떨어뜨리면 제대로 맞았나 채점하던 사격통제실도, 하루 종일 굉음을 내며 훈련을 하고 나서는 농구를 하거나 춤을 추던 미군 휴게시설도 그대로 복원해서 공개한다.


다시는 이 땅 위로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끔찍한 소음을 내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지난 시간의 흔적을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아픔을 딛고 평화를 말하다

아픈 기억을 헤집는 건 말이 쉽지, 참으로 힘든 일이다. 54년 동안 원하지도 않았던 전투기 소음을 들으며 살아온 마을은 사람마다 품고 있는 개인사가 곧 우리 시대의 뼈아픈 현대사다.
지난 2년 여의 시간 동안 전투기 사격훈련장 옆에서 평생을 보내며 고통을 겪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한 개인에게도 끔찍한 피해였지만 그 기억을 공유한 마을 공동체는 오랜 시간 병들어 있었다.


쿠니 사격장이 문을 닫은 후 이제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간으로도 온전히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상처가 깊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간 곪디 곪은 상처의 고름을 짜내고 겨우 새살이 돋을 준비를 하는 시간 정도였다. 어떤 이에게는 반 평생, 또 어떤 이에게는 평생이었던 고통의 기억은 그리 쉽사리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그 때 들었던 생각을 말하는 것 만으로도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직접 겪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되질 않는 아픔이다. 그리고 그 세월을 다 겪어낸 사람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지금의 평화로움을 계속 누리는 것이다. 참 힘들게 찾아 온 평화였기에 다시 빼앗길 수는 없다는 절실함, 그리고 남들도 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평화를 빼앗겨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울림의 목소리다.


넓고 아름다운 평화생태공원을 함께 걸으며 이 마을의 조용한 평화가 계속 되길 바라 주는 것. 이 평안함은 어느 개인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가장 기본인 행복이라는 것.


54년 동안 이곳을 날아 다니며 괴롭히던 전투기가 다시는 어느 누구의 가슴에도 상처를 남겨선 안 된다는 것. 진저리 나던 그 고통의 순간이 아차 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새삼 일깨워 주는 것. 그래서 매향리 사람들에게 평화생태공원은 그저 풍광 좋은 놀이터가 아니라, 지난 고통을 기억하는 장소이자 영원히 잊지 않으려 가슴에 품은 곳이다.
평화가 없었던 순간을 뚜렷하게 기억하기에 더 절실하게 바라게 된 매향리는 바로 그 평화 자체다. 

함께 누리고픈 미래를 꿈꾼다

미 공군 사격장의 굉음을 들으며 자랐던 아이들은 어느새 가족을 이루고 자식이 생겼다. 아이를 가지면 귀를 틀어막을 솜부터 준비했던 어머니들은 이제 손자에 증손자까지 생긴 할머니가 되었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은 마을 하늘 위를 날던 전투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자식이 커가고 손자들이 자랄 수록 또 다른 불안함이 생겼다. 행여 내가 겪은 일들을 자손들이 되풀이 해서 겪게 되지는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걱정이 많아진다지만 그저 기우만은 아닌 것 같아 더 두렵다.


내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고민하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제 한 몸 먹고 살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여겼지만, 살아 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놓친 것도 많았다. 만약 매향리 마을이 남들처럼 평안만 했어도 그때 그 싸움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만약 그날 오후가 조금만 더 평화로웠다면 그렇게 분노로 소리 지르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그때 살림이 조금만 더 여유로웠다면 좀 더 나누고 서로 행복했을 텐데. 그렇게 비행기 소음 속에 놓쳐버린 일상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비행기가 내는 소리 대신 파도 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 할 수도 있었다. 사격장 깃발만 바라보며 허겁지겁 일하러 나가는 대신 미끼 하나 들고 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두런두런 정담을 나눌 수도 있었다.


마을 앞 바다에 포탄이 떨어지는 모습 대신 붉은 태양이 떨어지며 색색으로 물들이는 예쁜 구름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친구가 놀러 왔다가 전투기 소음에 놀라 도망가는 대신 밤새 이불 쓰고 떠들면서 추억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놓쳐 버린 순간순간들이 뒤늦게 가슴을 치지만 후회 대신 소망으로 가져보려 한다.


놓인 것만큼이나 가지게 된 무기도 많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는 평화가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고, 이 평화로운 풍경이 결코 공짜로 오지 않았다는 것도 배웠다. 소음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목소리를 마음 속에만 두지 않고 세상 밖으로 외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간절함과 용기가 변화를 만든다는 것을 배웠다.
불가능할 것 같은 꿈을 꾼 사람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행동한 사람들 덕분에 그런 모두의 마음이 한데 모여 오늘 매향리에는 평화가 찾아 왔다.


이제 매향리에서 출발해 화성 곳곳을 누비며 사람들을 만나보자.
저마다 꿈꾸는 화성의 미래를 만나고 우리가 함께 지켜내야 할 화성의 모습을 그려보자. 꿈꾸는 것만큼 미래가 그려진다는 것을 배웠기에, 꿈꾸며 움직인 만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기에, 지금부터 우리가 꿈꾸는 새로운 미래가 시작이다.


정리 이형찬 기자
<자료제공 군공항이전대응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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