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희태

 화성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 한 곳인 융릉은 사도세자(=추존 장조, 1735~1762)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1735~1815)의 합장릉으로, 아들인 정조가 친부인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을 현재의 화산으로 천봉하면서 기존에 있던 수원부의 읍치는 이전되어 새로운 신도시인 수원 화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뒤주 속에서 비명에 갔던 사도세자의 애끓는 효심은 총 13차례에 걸친 정조의 원행길과 왕릉보다 더 화려하게 조성된 현륭원(顯隆園, 최초 수은묘로 불렸으나, 이후 영우원과 현륭원을 거쳐 고종 때 장조로 추존, 융릉의 능호를 받음)의 모습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 화성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인 융릉(隆陵)의 전경     © 편집국


또한 기존의 종법 질서를 따르자면 정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친부인 사도세자가 아닌 죽은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 1719~1728)의 아들이었기에, 친부에 대해서 이렇게 추숭하는 것은 다른 논란을 부를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일개 서자에 불과했던 정원군을 대원군을 넘어 왕으로 추존한 것에 대해 당시 조정에서는 대통과 소통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거센 반대를 했음에도, 기어이 종법 질서를 ‘선조-원종-인조’로 바꾸었던 것이다. 정조 역시 종법 질서 상 아버지는 효장세자였기에 효장세자에 대한 추존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정도만 해도 문제가 없었을 텐데, 친부인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부의 읍치였던 화산으로 천봉을 결정한 이면을 통해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정조의 효심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 사도세자 태실에 대한 가봉공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화재다.     © 편집국


비록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와의 다짐으로 인해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지만, 현륭원을 왕릉보다 더 화려하게 조성한 것 자체로 깊은 울림과 정치적 함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 작업은 비단 현륭원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의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예천 명봉사에는 사도세자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당 태실은 세자이면서 유일하게 태실가봉이 된 사례라는 점은 주목해볼 지점이다. 즉 정조의 효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융릉과 함께 사도세자의 태실 역시 함께 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통 태실이라고 하면 왕가의 자손들이 태어날 경우 조성되는 아기씨 태실과 이 가운데 왕이 된 경우 가봉태실이 조성되어 웅장하면서, 동시에 왕릉에 준하는 품격을 갖추게 된다.

▲ 예천 명봉사에 자리한 사도세자의 태실, 융릉과 함께 주목해볼 역사의 현장이다.     © 편집국


이러한 사도세자의 태실은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된 <장조태봉도>를 통해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데, 소백산의 자락인 원각봉 아래 장조의 태실과 문종의 태실이 상, 하로 자리한 모습이다. 당시 장조의 태실은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로 불렸는데, 경모궁은 사도세자의 사당이기 때문에 해당 태실은 사도세자의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 사도세자 태실 중 가봉태실비의 경우 명봉사의 사적비로 재활용됨에 따라 새롭게 복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정조가 사도세자의 태실가봉에 보인 관심은 남다른데, <일성록>에서는 별도로 사도세자의 태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특히 사도세자 태실의 경우 명봉사 입구를 지나면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역 각석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3호)’이 있어, 사도세자 태실가봉 공사의 책임자 및 인원, 규모 등을 적어두고 있는 일종의 공사실명판이 남겨져 있다.


현재 사도세자 태실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져 <장조태봉도> 속의 태실을 현장에서 볼 수가 있는데, 태실가봉비의 경우 앞면에는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이, 뒷면에는 ‘건륭오십년을사삼월초팔일건(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봐야하는 것이 연호인데, 건륭은 청 황제인 고종(=건륭제)의 연호로, 건륭 50년을 환산해보면 1785년(=정조 9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재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으며, 사도세자의 융릉이 자리한 화성과 사도세자의 태실이 자리한 예천 명봉사를 함께 주목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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