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 편집국



발안리(發安里). 복촌(卜村). 짐대울

1785년에는 공이향(工以鄕)에 속하는 마을로 1831년 공향(工鄕)에 1912년에 발행된 조선지지기록에는에 발안리(發安洞)가 남양군(南陽郡) 팔탄면(八灘面)에 속한 것으로 적혀 있고,수원군 공향면(貢鄕面)에 발안장(發安場)과 복촌(卜村)이 있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복촌(卜村)의 복(卜)은 짐(卜)으로도 읽힌다.

발안리마을유적은 수원과 안중으로 연결되는 남-북향의 43번국도변 발안천이 곡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발안저수지 남서방향으로 연결되는 오두산, 누악산, 천덕산,등구산등의 구릉성 배후산지가 북쪽과 서쪽을 감싸 안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발안저수지에서 남서방향으로 곡류하는 발안천을 끼고 비옥한 토양과 용이한 경작, 수자원의 활용 등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충적지상에 형성되어 있다.

원삼국 ~ 백제시대의 주거지가 56동등 총320기의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 유물중 토기류가 다양하게 발견되고 기와류및 토제품으로 내박자, 방추자와 청동제 구슬과 철도자, 철검, 철촉등이 발견되었다.

마을지명의 발안은 

바란 = 발 안  (坪內.山內)의 뜻으로

여기서의 ‘발안’은 ‘벌안’을 뜻하는데 넓은 벌판의 안쪽이라는 뜻이다. 다행이 발안이 ‘바란’으로 표기하지 않아서 그 뜻을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벌’은 음이 ‘발’과 비슷해서 한자로 옮길 때 한자의 발(發)자로 소리 옮김 되기도 했다.

민속신앙 지명으로의 짐대울

현재의 향남읍 발안 2리 옴부리산 아래 마을의 이름은 예부터 ‘김대울’이라고 불려 왔으며 현재에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김대울이란 지명은 마을에 김씨 성을 갖은 마을 사람이 많아 김대울이라 불리웠다고 전하나 김대울은 ‘짐대울’에서 유래된 말로써 발안천 옆에 ‘짐대’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지명이다.

 향남읍 평리 배터길 303번지 근처의 발안천은 남양만을 막기 전까지 바닷물이 들어온 곳으로 현재의 지명으로도 ‘배터’, ‘배틀’으로 불리우며 도이2리 입구의 지명이 개낫벌이라 불리 우는 것도 이곳까지도 바닷물이 들어 왔다는 흔적의 마을 이름이다

짐대는 형태를 기준으로 솟대, 짐대, 돛대, 설대, 새대, 장승대 등으로 구분대고 , 기능을 기준으로 수살, 추악대, 진목, 소줏대, 표줏대, 효대 등으로 나누어진다. 짐대는 나무와 돌이 재료로 사용된다.

짐대를 세우는 목적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땅의 사악한 기운과 재앙을 눌러서 제압하고, 굴복 시키는데 있다. 이처럼 짐대는 지기(地氣)가 센 터를 눌러 준다는 풍수비보의 상징물로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장승처럼 마을 입구에 세워 마을 수호신으로서 역할을 한다. 마을에서 화재가 많이 발생하는 경우 그 원인을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화산의 영향이라 하여 짐대를 세우는데 이 경우에는 오릿대라 부른다. 짐대 위에 새, 물을 좋아하는 오리를 나무로 깎아 만들어 올려놓는다.

둘째, 행주형지세에 세워지면 돛대가 된다. 행주형 지세는 배의 형국을 말하는 것으로, 배가 돛대도 아니 달고 항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헌에 따르면 행주형지세에 세워지는 돛대를 주장(舟欌)이라 하고 돛대의 재질은 쇠, 돌, 나무인데 쇠돛대는 철장(鐵欌), 돌돛대는 석장(石欌), 나무돛대는 목장(木欌)이라고 한다.

셋째, 과거에 장원 급제하면 이를 기념하여 세웠다고 한다.

짐대나 솟대에 대한 신앙은 북아시아 여러 민족에게서도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또한 이 지역 청동기시대의 의기(儀器)에도 나뭇가지나 기둥에 새를 앉힌 조형물이나 문양이 간혹 발견된다. 이처럼 넓은 지역성과 청동기시대까지 올라가는 시간성은 짐대나 솟대가 고대로부터 북아시아 전 지역에 퍼져나간 보편적인 신앙 요소임을 알려 주는 것이며 이는 어쩌면 이 지역을 휩쓴 샤머니즘의 문화 파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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