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근 교수(철학박사)     ©편집국


어린 시절 ‘출가외인’ 이란 참 흔히 듣던 말이었다. 친정어머니 입장에서는 귓전으로 들은 시집간 딸의 어려운 소식을 들을 대마다 딸이 불쌍해서 짐짓 ‘출가외인이니…’ 하면서 태연한 척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다닐 때 아버지가 나에게 “언제 시간 나면 시청에 ○모 과장을 찾아 가 보라.” 하셨다. 우리 집은 시골이고 50여리 떨어진 시내에, 그것도 농사만 짓던 아버지가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도시의 시청 총무과장을 찾아보라 해서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여쭤 보았더니 당신의 외사촌이라 하셨다.


아버지가 13,4 세쯤에 이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살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할머니가 당신에게 지개를 지워 주시면서 외갓집에 좀 갔다 오라 하셨단다. 아침 일찍 지개를 지고 사십리나 되는 길을 터덜터덜 걸어 오후 늦게야 외갓집에 도착했는데 하룻밤을 자고 다시 빈 지개를 지고 되돌아 오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지개를 지워준 것은 외갓집에서 보리쌀이라도 한 자루 얻어 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정에서 할머니는 출가외인이었다.


출가외인, 이 말은 참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조선조에서 ‘출가외인’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사화 사건이 자주 일어나면서 멸문을 당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이 때 이후 벼슬아치들 사이에 ‘출가한 딸은 봐 주자.’ 하는 묵계가 성립되었고 어느 정도 효력을 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사족들 사이에는 “너는 이제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라” 하거나 시가에서 “여자를 잘못 들였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남존여비’란 말이 반드시 성차별적 사고에서 쓰인 말이 아니란 뜻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자녀를 차별적 사고로 기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결혼한 자녀들 중에 딸들이 대체로 효도하기 때문에 차별하여 기를 이유가 없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법도 바뀌어져서 여성이 친정의 유산을 상속받는 데서도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친정 쪽에서 자주 쓰이기보다는 시가에서 며느리를 수중에 움켜쥐려 하면서 자주 쓰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평등적 시민교육을 받고, 당당하게 결혼한 며느리가 시가의 부당한 간섭에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그러다 보니 겨우 삼포(三抛)를 극복하고 결혼의 관문 앞에 도달한 아들을 좌절시키기도 한다.


조선후기에 ‘출가’는 여성이 혼인으로 친정을 떠나 시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했다. 대개의 경우 죽든 살든 딸의 혼인 후 친정의 지원은 더 이상 없었다. 시집살이는 대체로 혹독했다. 젊은 부부가 혼인을 했다 해도 곧바로 살림을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가에도 방이 없어서 시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아버지는 동네 사랑방에서 야근) 10년을 시부모와 같은 방을 썼는데 집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가질 틈을 내지 못해 새 참을 이고 갈 때 밭고랑에서 아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었다.


과거에 ‘출가외인’이라면 여성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결혼하면서 모두 살림을 나니 아들도 해당된다. 이제라도 다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집에 들어와 살지도 않는 며느리에게 친정과의 끊어진 관계를 자꾸 상기시키려 하지 말고, 혼인한 아들을 품에서 밀어내는 시부모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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